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조양래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조양래

조선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대신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많은 대신들이 숙청되거나 유배를 가는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선 초기는 왕좌를 둘러싼 피의 정치 시기였습니다. 한명회는 세조, 예종, 성종을 보필하며 16년에 이르는 격변기 동안 권력의 핵심이었으며, 은퇴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한 드문 사례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조선 초기의 정치판도를 바꾼 책략가였습니다.

한명회의 가문은 고려 말 권문세가 출신으로, 조선 개국 후에도 부와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세종대왕의 네째 딸인 정의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세종의 아들인 문종, 수양대군, 양평대군의 매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세조의 아들인 예종 및 성종과 결혼하면서 왕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극에서는 그를 어리숙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그는 뛰어난 외교적 감각과 인맥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세조때부터 정계에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부터 성리학을 연구한 사대부들이 정치를 주도하였습니다. 태종과 세종은 정변과 정치적 책략을 통해 권력을 잡았던 공신과 권신들을 견제하였습니다. 세종과 문종 시대에는 과거 시험 출신 대신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으며,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문종이 단명하고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와 황보인이 섭정을 맡으며 정국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정변을 모의하였으며, 한명회는 책사로서 이를 적극 도왔습니다.

계유정난, 사대부 제거와 권력 장악

단종을 보필하던 강력한 사대부들은 수양대군을 견제하고 있었으며, 자칫하면 수양대군과 그의 측근들이 숙청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453년,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먼저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단종은 정변 세력의 압력 속에서 한명회를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으며, 1455년에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이후 한명회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를 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훈구파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정 세력은 계유정난 당시(1453년) 김종서·황보인과 함께 사대부 출신 핵심 대신 수십명을 처형하였으며, 1456년에는 단종 복위를 시도한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을 제거했습니다. 이들은 고려 말부터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대부들이었습니다. 이후 세조 9년(1463년)에는 이시애의 난을 제압한 남이와 강순 같은 훈구파 무장들조차 경쟁 대상이 되자, 예종이 즉위한 후 역모 혐의로 처형했습니다. 이렇게 훈구파와 사대부를 가리지 않고 반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며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훈구파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며 실용적인 정치를 펼쳤지만, 내부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며 음성적으로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습니다. 성종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적 도덕 정치를 강조하는 사림파를 등용하였습니다. 

한명회, 천수 누렸지만 부관참시 '수모'

한명회는 성종이 재위하는 동안 정치에서 은퇴한 덕분에 천수를 누리다가 1487년 자연사하였습니다. 성종이 재위하는 동안 초반에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훈구파 대신 유자광 등이 연산군을 부추겨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며 사림 세력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어 연산군은 점차 훈구파까지 견제하였고, 결국 갑자사화(1504)로 훈구파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한명회의 시신은 이때 무덤에서 꺼내어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정치는 많은 인재를 희생시켰으며, 이후 조선의 당파 싸움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반대 세력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정치 문화가 자리 잡았다면, 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정치 이념이 다른 세력과의 경쟁은 국가 발전을 위한 건전한 과정이 될 수 있지만,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질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한명회는 16년간 정권의 정점에 있었고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 사후에도 자신의 훈구세력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 놓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도 부관참시당하고 훈구파도 몰락하는 결과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 초기 역사에서 권력 독점이 불러온 피해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때입니다. 대통령 탄핵여부와 상관없이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 균형과 협력으로 보다 좋은 성과를 이룩하고 더 나은 결과를 낳는 선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치권은 특정 세력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발전을 고민해야 합니다. 유능한 정치가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유전학 박사/기능게놈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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