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래 프록스엔램 대표 /조양래
조양래 프록스엔램 대표 /조양래

인도는 약 200년간 대영제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여러 노력 가운데, 총이 아닌 한 줌의 소금이 두 나라의 관계를 바꾸는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간디가 바닷가에서 소금을 쥐어 올린 순간, 인도 전역에서는 총 대신 양심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폭력이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 대신, 변하지 않는 양심이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영국, 민족족의 운동 분산 위해 벵골분할령 발표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한 지 100년이 되던 해인 1857년에 무장 독립운동인 인도 대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 왕실은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장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도입하였습니다. 영국에 우호적인 교수, 변호사와 같은 엘리트 계층의 인도인을 조직하였고, 이들로 구성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는 초기에 영국과의 평화로운 대화 창구로 기능하였습니다. 당시 협의회는 온건하고 충성스러운 협상 조직으로, 독립보다는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행정 참여 확대, 세금 인하, 경제적 수탈 방지 등의 목표를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국민회의(INC)의 청원은 대부분 영국에 의해 무시되거나 형식적으로만 수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협의회 내부에서는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협의회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영국은 이를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벵골분할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행정 효율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벵갈 지역을 무슬림이 많은 동부와 힌두교도가 많은 서부로 분할하여 종교 갈등을 유발하고, 민족주의 운동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협의회는 국산품 애용, 영국 제품 불매운동, 자치권 요구 등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럽 제국인 러시아를 격파한 사건은 급진파에게 무장 투쟁과 대중 봉기와 같은 방법을 고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군, 암리차르에서 평화 시위대 학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인도 사회는 극심한 정치적 긴장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인도인들은 영국을 위해 약 130만 명의 병력과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대가로 자치 또는 점진적인 독립을 기대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러한 기대와 약속을 외면하였고, 오히려 인도 내 반영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롤럿법(Rowlatt Act, 1919년)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법은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식민지 독재 통치를 위한 악법이었습니다.

이 법이 시행되자, 간디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비폭력 시위, 파업, 거리 행진 등이 전개되었습니다. 펀자브 지역의 암리차르에서도 평화적인 반대 집회가 열렸습니다. 영국군 장군 더이어는 이를 반란의 조짐으로 판단하고 경고 없이 병력을 동원해 발포하였으며, 그 결과 10분 만에 379명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암리차르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살은 인도 전역에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평화 시위대에 대한 영국군의 무차별적 폭력은 간디가 주도한 비폭력 저항 철학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세계적인 관심과 거대한 변화를 촉진하였습니다.

◆간디, ‘양심적 불복종’·‘비협조’ 강조 

이 사건 이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더욱 큰 동력을 얻게 되었고, 민족운동은 대중화되었습니다.

간디는 ‘진리의 힘’에 기초하여 대중운동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무력 투쟁 대신 불의한 법에 도덕적 신념으로 따르지 않는 ‘양심적 불복종’과 ‘비협조’를 강조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영국 제품을 불매하고, 학교·법원을 보이콧하며, 공직에서 사퇴하는 등의 실천을 통해 영국 제국에 경제적·행정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후 1930년, 간디가 바닷가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식민정부의 소금세에 저항한 ‘소금행진(Salt March)’은 상징적 정점이 되었고, 전국적인 민중 저항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간디의 운동은 인도국민회의(INC)의 대중적 기반 확대를 이끌어냈으며, 영국 또한 더 이상 무력만으로는 통치가 어렵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35년 제정된 인도정부법(Government of India Act)은 일부 자치를 허용하고 지방 선거를 실시하는 등 식민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투쟁을 통해 영국이 협상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이는 이후 1942년 ‘인도 떠나라(Quit India)’ 운동,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 영국의 피로 누적 등과 맞물려 인도의 독립을 향한 결정적 국면을 마련하였습니다.

◆독립 이후 '200년 착취' 보상 요구하지 않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인도의 독립을 단순한 ‘정치적 요구’가 아닌 ‘도덕적 명분’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해방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제국주의 시대의 종식을 불러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간디의 사상과 전략은 단순한 정치 투쟁을 넘어 문명사적인 전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폭력 대신 도덕적 저항으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3·1운동,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제3세계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독립 이후 간디는 친영파 인사들을 처벌하기보다는 화해와 통합 노선을 추구하였고, 이는 인도식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간디는 화해를 추구하였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혼란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영국 정부에게 200년간의 착취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인도 사회의 도덕성과 간디 철학의 영향으로 해석되며, 한국과 같은 피해국의 전쟁 배상 요구 정서와 비교되는 지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유전학 박사/기능게놈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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