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래 프록스엔램 대표 /조양래
조양래 프록스엔램 대표 /조양래

역사 속에서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의 충돌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秦)는 엄격한 법치로 백성을 억누르다 불과 15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이후 새로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영웅들이 각축을 벌였고, 그 중심에는 무력으로 세상을 제압하려 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와, 타협과 현실 정치로 세력을 키운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있었습니다. 

항우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전쟁과 무예에 능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천하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전장에서 적을 압도하는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전투력과는 달리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습니다. 그의 곁에는 무력을 중시하는 장수들과 충성스러운 참모 범증이 있었지만, 항우는 인재를 널리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습니다.

반면 유방은 평민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두드러진 업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습니다.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의 책략가 장량, 천민 출신의 명장 한신, 행정 전문가 소하, 도축업자 출신의 장수 번쾌 등 다양한 계층의 인재를 등용하며 세력을 넓혔습니다.

항우가 '강한 자'만을 믿었다면, 유방은 '유능한 자'를 신뢰한 것입니다.

항우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공을 세운 사람에게도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뛰어난 장수 한신을 적절히 기용하지 못했고, 동맹 세력조차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함양(咸陽) 점령 후 진왕을 잔혹하게 처형한 사건은 그가 대의명분보다 감정을 앞세웠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독단적인 태도는 내부 불만을 키웠고 결국 세력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유방은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때로는 모욕을 참아내면서도 현실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패배 후에도 재기를 위해 병력을 재정비하고, 상대와의 협상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유방이 최종적으로 중국을 다시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 하나하나의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인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전장에서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으나 장기전에 대한 대비는 부족했습니다. 그는 단기 결전을 선호하며 한 번의 승리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유방은 달랐습니다. 패배하더라도 다시 병력을 모아 장기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실용적인 전략과 인재 활용을 통해 유방은 항우를 점차 압박했고, 항우는 사방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끝에 패망했습니다. 외형상 개인 능력은 항우가 더 뛰어났지만, 천하를 차지한 것은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타협과 인재 중용을 실천한 유방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의 대립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강경파였던 항우는 전장에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겼지만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고조 유방는 정치에서 승리했습니다.

천하를 얻으려면 작은 싸움의 승리보다 전략적 승리의 축적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리더에게 소통과 포용의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동료와 국민의 지지를 얻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이 완성됩니다.

유방은 한때 항우의 부하였던 한신, 영포, 진평과 같은 인재들마저 포용하며 천하를 통일했고, 이는 수백 년간 지속될 한나라 통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도 대통령선거 주자들이 다양한 인재를 모으려는 모습은 반복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20회의 대선에서 많게는 한 선거에 10명 이상의 후보가 출마했고, 총 13명의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탄핵이나 사임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대통령을 포함한 지도자들은 항우와 같이 뛰어났을지라도 유방이 시행했던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고, 타협과 협력의 과정을 통해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유전학 박사/기능게놈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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