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조양래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조양래

정치적 갈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왔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두 정치 세력이 극한 대립을 벌였는데, 그 중심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때 군사적으로 협력했지만, 결국 치열한 정치적 경쟁을 벌이며 공화정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마리우스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로마의 위기를 여러 차례 해결한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그가 주도한 군제 개혁은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전까지 로마 군대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시민만이 복무할 수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가난한 평민도 입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이 개혁은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병사들이 국가보다는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경향을 강화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마리우스는 평민의 권리를 확대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원로원 중심의 귀족 정치에 맞서 평민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퇴역 군인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등 민중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지배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술라는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로마의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리우스 밑에서 군사적 경력을 쌓았지만, 점차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며 마리우스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술라는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으며, 민중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적 경쟁이 아니라, 로마 사회의 변화와 관련된 깊은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의 충돌은 결국 군사지휘권을 둘러싼 사건에서 폭발했습니다.

당시 동방에서 미트리다테스 왕이 로마에 맞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술라에게 총사령관 직을 맡겼지만, 마리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평민회를 통해 결정을 번복하려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장악하며, 마리우스를 축출하는 강경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로마군이 자국의 수도를 점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술라가 전쟁을 위해 동방으로 떠나자,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 다시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마리우스가 술라의 지지 세력을 숙청하며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곱 번째 집정관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로 사망했습니다.

마리우스가 사망한 후, 술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정권을 장악하며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술라는 공화정의 기본 원칙을 무너뜨리고 귀족 중심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미 로마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화정의 권력 균형이 무너졌고, 결국 로마는 점점 황제 중심의 제국으로 변해갔습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 간의 권력 투쟁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와 기존 질서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정치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폭력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사회 전체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각국의 정치에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이념과 정책 차이를 두고 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이, 극단적인 대립보다는 대화를 통한 타협이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했고, 결국 로마 공화정은 무너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역사를 거울삼아 갈등을 해결하는 더 성숙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조양래 프록스엔렘 대표 (유전학 박사/기능게놈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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